부처님께 귀의하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부대중이 다함께하는 제12교구 해인사 말사. 진주 월아산 청곡사

청곡사 문화 산책

청학포란형의 완벽한 풍수명당, 비보(裨補) 사찰 청곡사(靑谷寺)

청곡사 | 2018.06.23 01:34

청학포란형의 완벽한 풍수명당 청곡사(靑谷寺)


진주시 금산면(琴山面) 갈전리(葛田里) 달음산 자락에 청곡사가 있다. 이 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써 서기 879년 신라 제49대 임금 헌강왕(憲康王) 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創建)하였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날 도선국사가 진주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 곳을 지날 무렵 남강변에서 청학(靑鶴)이 날아와 앉는 곳이 있었다. 지리를 살펴보니 서기(瑞氣)가 충만한 천하에 명당이라 절터로 정하고 청곡사를 지었다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고려말(高麗末) 우왕 때 실상사 장로(實相寺長老) 상총대사(尙聰大師)가 중건(重建) 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불탄 것을 선조, 광해년간에 실상스님과 보우스님 등이 복원(復元)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곡사의 주산은 해발 482m의 월아산(月牙山)이다. 그러나 원래의 산 이름은 달빛이 산을 타고 올라왔다하여 달 올음산이라 하였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달음산 또는 달엄산이라 불렀다가 후세에 한문식 표기로 달빛이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의 월아산이라고 부른다.


진주의 젖줄인 남강이 허리를 감고 도는 이 산은 동쪽에는 장군대봉이 서쪽에는 국사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진주성과 함께 진주 사람들의 정신적 요람이자 기상의 상징으로 임진왜란을 비롯한 수많은 국란기에 우국충정의 국가관을 갖게 했던 진주지방의 이름난 명산이다.


향토지인 진양지에는 동쪽에는 비봉의 형국이 있고 서쪽에는 천마의 형국이 있어 예로부터 산 동쪽에는 정승이 나고 산 서쪽에는 장수가 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청곡사 학영지(鶴影池) 아래 주차장에서 바라본 청곡사의 형국은 영락없는 청학포란형(靑鶴抱卵形)이다.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학이다. 그 청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절은 청학의 머리 부분 혈처에 자리 잡고 있다.


청곡사 부도탑군 옆에 세워 놓은 월아산 등산안내도를 보면 청곡사의 형국이 한 눈에 드러나는데 월봉에서 내려온 용맥 하나가 청곡사 바로 뒤편에서 봉우리 하나를 솟구쳐 놓았는데 이것이 청학의 머리가 된다. 바로 아래 청곡사 대웅전이 자리를 잡았으며 그 아래쪽은 학의 부리에 해당한다.


장군대봉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 물과 월봉에서 내려온 두 개의 물줄기가 청곡사와 주차장 사이 지점에서 한 데 만나는데 이곳에는 학영지(鶴影池)라는 저수지가 있다. 청곡사의 명당수이다. 학의 부리가 멈추는 곳은 정확히 학영지이다. 이는 월아산의 정기가 스며있는 명당수를 청학이 들이마시고 청곡사 대웅전으로 보내주는 의미가 된다.


일설에 의하면 학영지는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가 처녀시절 밤마다 학영지에 와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못에 비추며 고고한 학에 비유하였다 하여 학영지라 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전설이야 그렇다 치고 풍수적으로 보는 학영지는 이와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학의 부리가 정확히 닿은 곳이 학영지이니 당연히 연못에는 학의 모습이 비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학영지라는 연못의 이름은 청학포란형에서 나온 풍수적 명칭이지 신덕왕후와는 무관하다 여겨진다.


청곡사에는 형국과 관련하여 지은 이름들이 많다. 주차장을 떠나 절로 들어가는 산길을 접어들면 한여름의 녹음이 우거진 숲길이 나온다. 이내 월아산 청곡사란 현판을 달고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만나는데 합장하고 들어서면 여기부터 부처님 세계인 불국정토이다.


한적한 숲길을 따라 얼마를 걷노라면 왼쪽으로 우거진 나무숲에 가려진 신비한 모습의 연못이 있는데 이곳이 학영지이며 월아산의 정기가 고스란히 모여 있는 곳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오래된 나무가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데 마치 주왕산의 주산지를 보는 듯하다.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면 금방이라도 청학이 날아와 물을 마실 것 같은 신비감마저 감도는 연못의 풍경이다.


이 곳에서 바라보면 월봉에서 내려온 청학의 머리모습이 더욱 뚜렷하다.

월아산 정기를 부리로 품어 올리는 청학의 모습을 연상하며 편안하게 열려진 숲길을 다시 걸으면 천년의 역사와 함께 이곳에서 득도하였던 고승들의 부도탑군을 만나게 되고 합장하고 돌아서면 경내로 들어가는 돌다리가 놓여있다.

돌다리의 이름은 방학교(訪鶴橋)이다. 학이 찾아드는 다리라는 뜻이다. 이 순간 다리를 건너는 사부대중은 모두 부처님을 향해 찾아드는 청학이 되는 것이다.


방학교를 건너면 불이문을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돌계단 옆에 서 있는 아름드리 고목이 청곡사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월아산 청곡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이곳은 가람배치의 순서대로 본다면 천왕문쯤이라 보아야 하는데 사천왕상이 없다. 그래서 혼자 불이문(不二門)이라 생각해 본 것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종루가 있는데 종루 밑을 지나는 하심문(下心門)을 나오면 정면에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51호이다. 단층의 우아한 모습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다포계 형식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종루 옆에는 환학루(喚鶴樓)가 있는데 학을 부른다는 뜻이다. 학영지, 방학교, 환학루의 이름은 모두 청곡사가 청학포란형임을 말해주는 증거들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나한전 옆에 세워 놓은 삼층석탑이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이 탑은 놓인 장소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전통적인 가람배치에서 보면 탑은 언제나 대웅전의 앞뜰에 부처님을 마주하고 놓여 있다. 그러나 청곡사의 석탑은 엉뚱하게도 절의 구석자리인 나한전 옆에 자리잡고 있다. 왜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풍수적 비보의 이유에서다.


대웅전이 있는 곳은 명당의 혈처이다. 혈처는 땅의 생기가 가장 많이 응축된 지점이 된다.

 금학의 형상을 갖춘 청곡사의 혈처는 바로 학의 머리부분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웅전 앞에 탑을 안치하면 학의 머리위에 탑을 얹은 셈이니 이렇게 되면 학은 날 수가 없어 머리를 땅에 쳐박고 고꾸라지는 의미가 된다. 이는 청곡사의 몰락을 의미하게 된다.


또 한 가지의 의미는 탑은 절에서 불상 다음으로 신성시 여긴다. 학이 알을 품을 때에는 날개밑에 알을 넣고 품는다. 따라서 탑을 부화시킬 알로 보고 학의 품에 해당하는 날개 밑에 배치한 것이다.


청곡사 안산은 둥그런 금성산이다. 풍수에서는 이를 노적가리봉이라 한다. 볏짚단을 쌓아놓은 모양의 봉우리라는 뜻이다. 이런 봉우리가 앞에 있으면 식량이 풍부한 터가 된다. 속가의 말로 부자가 된다는 뜻이다. 속가나 불가나 식량은 사람의 생존에 필수요소이다. 청곡사를 창건한 도선국사는 이 또한 염두에 두어 노적가리봉을 정면에 두는 곳에 3층석탑을 배치하여 놓았다. 절에 식량이 풍부할 것을 기원한 것이다.


3층석탑에는 또 하나의 풍수적비보장치가 걸려 있다. 바로 탑의 끝에 달린 원형 고리와 원주형의 장식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깨어져 형태만 갖추고 있는데 원주형의 모양은 아직도 뚜렷하게 알아볼수 있다. 이것은 학이 알을 부화한 뒤에 날아가 버리지 못하도록 학의 목을 고리로 채워놓았다는 뜻이다.


학영지, 방학교, 환학루 등과 함께 3층석탑이 가지는 다양한 풍수적 장치는 청곡사의 절터를 금학포란형의 완벽한 명당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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