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절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은 아니지만,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면 으레 절이 있기 마련이다. 명산대찰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터. 산에 오르려면 꼭 어느 절 일주문을 지나야만 한다.
산수경계에 들어서는 것이 곧 일주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으니 일주문에서 합장 반배하는 것은 산과 하나되기 전에 곧 몸과 마음을 낮추는 행위다.
사실 옛 선현은 산에 오르는 것을 "등산"이 아니라, "입산"의 개념으로 보았다. 등산이란 말은 오로지 산을 오르는 것에만 목적을 둔 것이다. 선현은 "정상정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산에 올랐다. 산과 하나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산에 오르는 최고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으로 들어서는 길의 일주문은 부처의 땅으로 들어선다는 경계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도선국사가 택한 명당, 월아산 청곡사경남 진주시 금산면에 위치한 월아산은 진주시민들이 자주 찾는 쉼터이다. 시내에서 10여 분만에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이고, 높이가 482m밖에 되지 않아 한나절 산행으로 알맞은 곳이다.
월아산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둘레가 5km나 되는 금호지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유래가 천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자연 저수지인 이곳은 월아산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월아산에 보름달이 떠오르면 금호지 맑은 물에 달빛이 번지는데 이를 두고 옛 사람들은 "아산토월(牙山吐月)"이라 하여 진주 12경의 하나로 꼽았다.
월아산도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곧 청곡사 일주문을 볼 수 있다. 월아산 청곡사에는 도선국사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온다. 신라 말 도선국사(827〜898)가 진주 남강에서 푸른 학이 이곳 월아산 기슭으로 날아와 앉자 성스러운 기운이 있다하여 청곡사를 세웠다 한다. 청곡사 입구에 있는 방학교(訪鶴橋)가 그 전설을 뒷받침해 준다.
청곡사 뿐 아니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절은 정말 많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어림잡아 10여 곳이 넘는다. 그가 이렇게 많은 절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 말 헌강왕(재위 875〜886)때 궁궐에 들어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5세에 출가해 전국을 떠돌며 수도를 했던 도선은 이미 19세에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았고, <도선비기>나 <도선답산가> 등을 펴냈을 정도로 풍수지리를 꿰뚫고 있었으니 명당명승지에 절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선불장을 뜯어 사랑채를 지었던 강 부자청곡사에 들어서면 대웅전 왼편에 "선불장"이라는 건물이 있다. 한여름 이곳 마루에 앉아 있으면 월아산 기슭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선불장의 기둥은 반으로 잘려져 있는데 1890년 경 청곡사가 비워져 있을 무렵 선불장 기둥이 탐이 난 강덕수라는 부자가 선불장을 뜯어 사랑채를 지었다고 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강 부자는 집안이 몰락했는데, 청곡사를 지키는 제석천왕과 대범천왕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제자리로 옮겨 짓게 되었다. 그 후 기둥이 잘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선불장 기둥에는 이 같은 "실화"를 소개하는 글을 볼 수 있다. 주인이 없다해서 청곡사 건물을 마음대로 뜯어다 사랑채를 지었던 그가 몰락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강 부자를 망하게 했던(?) 그 제석천왕과 대범천왕은 보물 1232호로 지정되어 현재 진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당간지주에 새겨진 네발 달린(?) 사람의 얼굴현재 청곡사는 공사 중이다.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대웅전 계단 앞에 보면 이전에 사용하던 당간지주가 놓여 있는데, 윗부분을 보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네발로 납작 엎드린 형태가 개구리 같기도 한데 머리 부분을 보니 영락없는 사람이다.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발 달린 동물은 거북과 토끼인데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것과는 다르다.
9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트리고 곤륜산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얻었던 남편 "예" 몰래 혼자서 불사약을 먹고 월궁으로 향했지만 남편을 속인 죄과로 두꺼비가 되고만 절세가인 "항아"를 조각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조각의 주인공이 항아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보름달이 아름다운 월아산 자락에 쌓여 있는 청곡사의 당간지주라면 가능한 일일 수 있다. 가만히 뜯어보면 남편을 속인 죄를 속죄하고 있는 듯한 표정 같기도 하고. 하여튼 당간지주를 만들던 석공의 단순한 장난 같지는 않다.
죽은 이의 죄를 따져 묻는 곳, 업경전 항아가 불사약을 홀로 먹은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공통된 마음이다. 하지만 죽지 않는 것은 전설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인간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혹시 사후세계에 어떤 심판관이 나의 죄를 물을지 궁금한 사람은 청곡사 업경전에 들어가 보기 바란다.
보통 사찰에서는 지장전, 명부전이라고 하는데 청곡사는 특이하게 업경전(業鏡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업경"은 죽은 이의 죄를 살피는 거울을 말하는데 업경전에 들어서면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부처가 되기를 포기한 지장보살 좌우로 시왕(十王, 염라대왕도 시왕 중 하나다)이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도열해 있다.
업경전 안에서는 산 자가 아니라 시왕의 심판을 받는 죽은 자가 된다. 등에 한기가 스치는 걸 보니 지은 죄가 많은가 보다. 죄 없는 사람이야 두려워 할 것도 없겠지만, 후덥지근한 한낮에도 업경전은 찬기운이 흐른다.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고자 한다면 지긋이 눈을 감고 업경전에서 삼매에 빠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X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는 하지만 개X 같은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조경국 기자/ 200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