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그림, 세상 살아갈 걱정과 집안 우환을 덜어 주는 그림. 부처와 보살, 제자, 수호신 등이 등장하는 절간 불화는 바로 그런 그림이다. 겨레의 옛 불자들은 마음으로 빌던 부처의 따뜻한 자비와 은총을 눈 앞에 펼쳐놓는 거대한 불화를 반겼다. 평소에 볼 수 없던 고려, 조선시대의 불화 걸작들이 국공립과 사립 박물관 전시장에 한꺼번에 나왔다.
그 첫머리에 고려, 조선초의 그윽한 희귀 명품불화들이 있다. 동국대 박물관(관장 정우택)에서 전시중인 ‘건학 100돌 기념 국보전’에서 이들 명품을 보는 안복을 누릴 수 있다. 관음보살도, 마리지천도, 아미타팔대보살도, 지장삼존도 등 정 관장이 일본과 국내 수장가로부터 빌어온 귀중한 불화들이 2층 전시장을 채웠다. 일본에서도 공개된 적이 없는 최고 품격의 불화다. 1477년 그려진 <약사 12신장도>와 16세기 <금선묘아미타팔대보살도> 등의 조선 초 불화들은 전시의 고갱이격이다.
당대 최고의 화사들에 의해 화면 가득 세밀한 무늬와 선으로 메워진 궁중화풍의 불화들. “불교 회화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중요한 자료들”이며 “앞으로 국내외 어디서도 두번 다시 볼 수 없을 전시”라는 정 관장의 귀띔이다.
1447년 성종의 누이동생 명숙공주가 발원한 <약사삼존십이신장도>는 섬세·우아한 인물 도상과 아련한 구름을 피워올리는 부처 위의 천개 장식 등이 아련한 공간감 속에 다가온다.
고려 불화의 매력은 단호할 만큼 명확한 구성과 색감이다. 일본 교토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는 아미타여래가 여덟 보살을 거느린 모습을 담는다. 인물 특징이 한 눈에 들면서도 신비한 분위기가 투명한 옷자락과 현란한 무늬 사이로 풍긴다. 장식 세부는 다 쳐버리고 명쾌하게 부각된 보살들의 정연한 모습, 그들이 입은 옷자락은 금니로 정성껏 선을 입혔다. 거북이 무늬나 원문 등 옷에 그린 무늬 크기나 이미지를 조절해 색감을 바꾸는 놀라운 경지도 보인다.
달마의 모습을 닮은 <관음도>는 선불교의 비조 달마같은 용모에 굵은 먹선으로 툭하니 윤곽을 그어 선승 같은 관음이다. 14세기의 <지장삼존도>는 윤곽선을 그린 뒤 주위를 부옇게 하는 일종의 스푸마토 기법을 써서 보주를 안고 단정하게 앉은 지장보살의 단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몸장식을 전부 금니로 묘사한, 여덟개 팔을 지니고 선 밀교신 마리지천도의 모습 또한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전시장에는 이밖에도 추사 김정희가 필사한 것으로 추정하는 관음경, 고려시대 회화사의 교과서와 같은 자료인 불교시집 ‘어제비장전’의 판화, 명대의 연호(홍치 2년)가 새겨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청화백자송죽문호 등 다른 명품들도 가득하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실의 큰 벽을 차지하고 들어선 국보 302호 진주 청곡사 괘불전(10월22일까지)은 소박하면서 끈끈한 조선후기 승려들과 대중 불자들의 염원을 반영한다. 이 괘불은 길이 10m, 폭 6.3m에 이르는 대형 불화다. 조선 후기 불화의 대가 의겸 등 열명의 화승이 함께 그린 걸작 걸개그림이다.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는 6m 넘는 석가모니불상의 위엄있는 자태 옆에 부드럽고 인자한 표정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고 그 뒤로 여러 보살과 제자들이 함께 따른다. 화려한 하늘 옷을 입은 이들의 거대한 모습은 가까이 가서 보면 온갖 꽃무늬, 원형 무늬 등 예쁜 무늬들이 채워져 그 자체로 화엄의 꽃밭 속에 잠긴 기분을 느끼게 된다.
무게 114kg이나 되는 이 괘불을 넣었던 길쭉한 괘불함은 거북이 자물쇠, 용머리 손잡이, 연꽃 동자들이 돋을새김된 앞바탕 등 장식이 구경거리다.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83호와 교체 전시중인 3층 불상실도 꼭 들러봐야 한다.
괘불의 매력에 맛들인 이들에게 또하나의 가품이 기다린다.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 현관에서 10월 29일까지 장기 전시중인 17세기의 경기 안성 청룡사 괘불탱(보물 1257호)이다. 세로 9.18m, 가로 6.5m의 이 괘불은 1658년 그린 조선 중기의 괘불 대표작으로 석가모니와 6대 보살, 10대 제자, 법을 청하는 사리불 등의 모습이 다채롭다. 석가모니의 몸 주위로 오색 광선이 뻗쳐나가고, 적녹색 화면에 꽃비가 내리는 듯한 옷과 바닥 꽃무늬, 인물 사이를 누비는 상서로운 구름 등이 아찔하다. 불화들의 잔치는 단연 올 5월 미술동네 감상의 최고 화두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