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여년 활동하며 불상 조성·개금 태원·상정 계보를 계승한 조각승
용주사 대웅보전 석가불상 제작 내장사 주석하며 전국적 활동해
18세기 후반에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계초(戒初) 스님은 앞 시기를 대표하는 태원(太元, 泰元) 스님과 상정(尙淨, 常淨, 相淨) 스님을 계승한 조각승이다. 계초 스님은 스승과 마찬가지로 목조로 불상을 제작하거나 개금(改金)·중수(重修)하였다. 현재 계초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목조불상은 전국에 걸쳐 4건 4점이 조사되었다.
아직까지 계초 스님의 생애와 조각승이 된 배경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불상에서 나온 발원문과 불화 화기(畵記) 등의 문헌을 통하여 활동 시기와 거주 사찰, 조각승 계보 등을 알 수 있다.
계초 스님은 태원 스님과 1745년에 서울 강남 봉은사 영산전 불상을 조성하고, 상정 스님과 1750년 경남 진주 청곡사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과 시왕상 개채(改彩)를 하였다.
당시 계초 스님은 16명의 조각승 가운데 10번째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불사(佛事)의 보조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계초 스님은 수화승(首畵僧)으로 1754년에 전남 곡성 수도암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유순(有淳) 스님, 칭숙(稱淑) 스님, 우학(宇學) 스님, 등해(等海) 스님과 조성하고, 1755년에 임한 스님이 조성한 경북 청도 용천사 대웅보전 삼신불도에 시주자로 참여하였으며, 1757년에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99년부터 1702년까지 성능대사가 중건한 구례 화엄사 각황전 내 봉안된 불상을 상정 스님과 개금하였다. 각황전 내에 봉안된 세 구의 불상과 네 구의 보살상은 높이 350㎝ 이상의 장육상(丈六像)으로 사적기(事蹟記)에 상정 스님과 계초 스님만 적혀 있지만, 최소한 10여 명의 조각승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초 스님은 1770년에 경북 울진 불영사 불상을 최성(最性) 스님과 조성하고, 1790년에 경기 화성 용주사(龍珠寺) 대웅보전 불상을 제작하였다. 화성 용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본사로, ‘효심(孝心)의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정조가 선친(先親)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花山)으로 옮겨 조성한 현륭원(顯隆園)을 보호하기 위해 세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능침(陵寢)을 관리하고, 망자(亡者)의 명복을 비는 재(齋)를 지낼 목적으로 건립된 사찰을 능사(陵寺)라 부르는데,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능사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유교(儒敎)의 덕목 가운데 하나인 효사상이 사회 전반에 퍼져 망자의 극락왕생을 바라던 종교적 믿음은 몇 차례 능사 건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용주사 대웅보전 봉안 불상은 ‘각항택일(各項擇日)’에 1790년 8월 16일 시작하여 9월 26일 점안하려고 계획되었지만, <원문(願文)>에는 8월 16일 시작하여 9월 30일 완성한 후, 10월 초에 점안식(點眼式)을 거행한 것으로 적혀있다. 이러한 문헌을 근거로 목조석가삼존불좌상은 대략 한 달 보름만에 제작되어 1684년에 색난 스님이 만든 전남 강진 정수사 나한전에 조성된 불상이 열 달 동안 제작된 것에 비하면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을 제작한 승려는 <제인방함(諸人芳啣)>에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 통정 계초(戒初), 서방 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 통정 봉현(奉絃), 동방 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통정 상식(尙植)으로, 〈원문〉에서는 상식 대신에 상계(尙戒)가 적혀있다. 또한 관음보살을 만든 관허설훈(觀虛雪訓)은 18세기 후반에 불상과 불화를 제작한 최고의 재능을 가졌던 스님이다.
또한 스님은 1791년에 지장암 팔상전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현재 전남 해남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대좌만 남아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계초 스님의 활동 시기는 1745년 2월부터 1791년 3월까지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발원문과 불화 화기 등을 중심으로 계초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스님은 1720년대에 태어나서 1740년대 보조화승으로 활약한 후, 1750년대 상정 스님과 불상 제작과 개금을 주도적으로 하고, 1750년대에는 4명의 조각승을 이끄는 수화승(首畵僧)으로 활동하였다.
스님은 주로 암자에 봉안되는 중소형의 불상을 만들고, 호남과 영남의 주요 사찰에 봉안된 불상을 중수·개금한 것으로 보아 전국적인 명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계초 스님은 1790년에 정읍 내장사에 머물렀음을 문헌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계초 스님은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계심, 봉현, 칭숙 등과 일정한 순서 없이 발원문마다 앞뒤로 순서가 바뀐 것으로 미루어 동년배일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계초 스님의 계보는 진열(-1695-1722-)→태원(-1706-1748-)→상정(-1743-1775-)→계초(-1745-1790-), 우학(-1745-1774-), 봉현(-1780-1790-), 칭숙(-1754-1780-), 계심(-1771-1787-), 유순(-1750-1755-) → 등현(-1780-1791-) 으로 이어진다.
계초 스님이 수화승으로서 만든 대표적인 불상은 1754년 곡성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곡성 수도사 봉안)과 1790년 용주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좌상의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이 있다.
곡성 수도암 원통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전체 높이가 83㎝, 무릎 폭이 59㎝인 조선후기 중형보살상이다. 보살상은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보관을 쓰고,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보관의 중앙에는 하강하는 봉황 밑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화불(化佛)을 배치하고, 측면에는 수평으로 날고있는 용과 화염문 등을 빈틈없이 장식하였다. 보살상은 둥근 얼굴에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원통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가지고 있다. 따로 만든 손은 손목에 끼워 넣었는데,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고 있다.
두꺼운 대의는 변형우견편단(變形右肩偏袒)으로, 대의 끝은 오른쪽 어깨에 걸친 편삼의 위를 지나 팔꿈치 뒤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수직으로 내려와 배부분에서 부채꼴로 펼쳐져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놓여 있다. 승각기(僧脚崎)는 가슴에서 수평으로 묶어 상단 중앙에 안상같은 마름모꼴 주름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좌우대칭의 주름을 표현하였다. 보살상의 뒷면은 목 주위에 대의 끝단을 두르고, 왼쪽 어깨에는 앞에서 넘어온 오른쪽 대의 끝자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다.
용주사 대웅보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전형적인 조선후기 불상의 형태와 의습을 따르고 있다. 석가불은 오른손을 촉지인(觸地印)하고, 왼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손바닥을 펴고 중지와 약지를 손바닥 쪽으로 구부려 엄지와 맞댄 수인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인은 1684년에 제작된 강진 정수사 조성 목조석가여래좌상(강진 옥련사 봉안)의 왼쪽 팔에 “석가(釋迦)”라는 명문이 있어 조선후기 석가여래의 수인임을 알 수 있다.
석가불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로, 앞으로 숙인 머리의 나발은 촘촘하지만, 육계의 표현이 명확하지 않다. 머리 정상부에 원통형의 정상계주와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었다. 전체적인 얼굴 형태에서도 석가불은 턱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 원통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이 표현되었다.
불상이 걸친 대의는 편삼을 입지 않은 변형통견으로, 대의 끝이 오른쪽 어깨에 반전하는 옷깃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팔꿈치 뒤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있다.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부채꼴로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펼쳐져 있다. 석가불은 계초가 1754년에 제작한 곡성 관음사 보살상 같이 복부 바로 밑에 가장자리 의습선이 완만한 S자를 이루고 있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가슴까지 올려 끈으로 묶어 둥근 양감을 준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주름이 대칭을 이룬다. 불상의 뒷면은 목 주위에 대의 끝단과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 끝자락이 대좌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계초와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18세기 후반에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불상은 전남 순천 선암사 불조전 목조여래좌상(1구), 경기 남양주 흥국사 극락전 목조삼존불좌상, 전라북도 고창 문수사 목조여래좌상(선운사 성보박물관 봉안) 등이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 신성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