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귀의하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부대중이 다함께하는 제12교구 해인사 말사. 진주 월아산 청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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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

청곡사 | 2018.06.22 15:59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인도 북부지역에 위치한 카필라(Kapila)국 석가(釋迦)족의 정반와과 왕비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姓)은 고타마(Gotama-최상의 소)였고,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였으나,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시자, 사람들이 석가모니(Sskyamuni-석 가족 출신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인간으로서 가진 한계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승화시켰는지를 깨닫고,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는 것이 불자의 과제일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바램으로, 부처님의 생애를 팔상성도(八相成道)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도솔래의상 (都率來衣相): 부처님의 전생모습


오래 전 수메다라는 한 수행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연등(燃燈)이라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셔, 모든 사람들이 연등부처님을 공양하고자 온갖 향과 꽃, 훌륭한 음식을 준비하고 연등부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 곳에 들른 수메다는 연등부처님께서 세상ㅇ에 출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쁜 마음이 되어 “나는 여기에 깨달음의 씨앗을 뿌려야겠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수메다는 부처님께 바칠 공양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공양물은 부처님께 바쳐져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수메다는 아름다운 일곱 송이의 꽃을 들고 가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꽃을 팔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꽃을 팔지 않으려고 그녀는 자싱이 들고 있는 꽃 한 송이는 1백 냥이며, 또한 자신과 결혼을 약속한다면 꽃을 팔겠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수메다는 거절하였으나 꽃을 부처님께 바칠 마음으로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수메다의 마음에 감탄한 그녀는 나머지 꽃마저 부처님께 공양하라며 주었습니다. 수메다는 그 꽃을 연등부처님에게 바쳤습니다.


또, 연등부처님과 제자들이 지나는 길에 진흙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수메다는 연등부처님께서 발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위해 그 진흙웅덩이 위에 머리를 풀고 엎드렸습니다. 진흙 바닥에 엎드린 채 수메다는 생각했습니다. “아! 나도 언젠가는 지금의 세존이신 연등부처님같이 완전한 인격자가 되어가기를…. 세존이신 연등부처님께서 지금 하셨듯이, 나도 이 최고 법의 수레를 돌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오직 세상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많은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할 수 있고 또한 무수한 생명들의 이익과 행복이 될 수 있는 연등부처님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소서”라고. 이 광경을 본 연등부처님은 제자와 대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행을 하고 있는 이 수행자를 보라. 그는 지금으로부터 무량겁이 지난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될 것이니라.”


모든 이가 지나간 뒤, 수메다는 몸을 일으켜 앉아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쌓아온 수행을 생각해 보자.’ 그 때 세계가 진동하였고 그 진동에 놀란 사람들에게 연등부처님은 수메다가 부처님이 되기 위한 근본적인 덕목을 사유하고 있는 이유로 세계가 진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메다가 모든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의 근본덕목인 10바라밀의 수행을 닦고, 10만 이승지겁을 지내며 24분의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머물게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호명보살이었습니다.


호명보살이 도솔천에 머물고 계실 때 모든 하늘 셋P의 천인(天人)들이 보살의 처소에 모여, 호명보살께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당신이 10바라밀을 행(行 )하심은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일체지(一切智)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신 것이나이다. 스승이시여, 바야흐로 부처님이 되기 위한 때가 왔나이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부처님이 될 때이나이다.”라고 간청했습니다. 호명보살은 천인들의 간청을 받아 들여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날 곳을 살핀 뒤 석 가족 마을에 살고 있는 마야부인의 태중에 드시리라 결정 하셨습니다.

정반왕과 결혼한 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던 마야부인은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자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 10바라밀

   ①보시(布施) - 모든 것을 베풂

   ②지계(持戒) - 계율을 지킴

   ③출리(出離) - 번뇌의 속박을 떠남

   ④지혜(智慧) - 존재의 실상을 깨달음

   ⑤정진(精進) - 끊임없이 노력

   ⑥인욕(忍辱) - 욕됨을 참음

   ⑦진실(眞實) - 거짓 없음

   ⑧결정(決定) - 굳게 뜻을 다짐

   ⑨자비(慈悲) -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행함

   ⑩사(捨) - 공평하여 치우침이 없음


2. 바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부처님의 탄생모습


마야부인은 해산 일이 다가오자 인도의 관습에 따라 친정인 데바다하로 향하였습니다. 친정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 동산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동산에는 아름다운 사리나무 꽃들이 만개해 있었고, 왕비는 상서로운 사리나무 숲을 뻗어 사리나무가지를 잡으려는 순간 산기를  느꼈습니다. 일행은 급히 처소를 마련하였으나 마야부인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선 채로 아무런 고통 없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 하늘을, 또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토하셨습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고통에 잠겨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태자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나 오색의 감로수로 태자의 몸을 씻어 주었으며, 땅이 은은히 진동하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천신들이 내려와 차례로 애배드리며 이 세상에 가장 존귀한 분의 탄생을 축복하였습니다.


태자가 태어난 지 닷새가 되자 히말라야로부터 아시타 선인이 내려와 태자를 뵙자고 하였습니다. 태자의 얼굴을 본 아시타 선인은 슬피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불길하게 생각한 정반왕이 연유를 묻자 아시타 선인이 대답하기를 ‘왕자는 출가하면 부처님이 될 것이요,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이 될 것인데, 자신이 늙어 부처님의 출현을 뵐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야부인은 태자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싯다르타 태자는 이모를 새어머니로 하여 자라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 따라 아들이 출가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정반왕은 태자가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호화로운 궁전을 지어 향락 속에서 자라나게 했습니다. 왕궁의 풍요로움 속에서 성장한 싯다르타 태자는 7세에 학문과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여 곧 모든 학문과 무예에 통달, 더 이상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없게 되었습니다. 정반왕은 아들을 극진히 생각하여 계절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궁전을 세 곳이나 지어 주는 등 태자를 온갖 호사 속에 성장하게 하였고, 태자가 현실의 고통을 모르게 하기 위하여, 도성 밖으로의 출입은 언제나 금지시켰습니다.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4문을 통해 생로병사를 보시는 모습

12세 되던 해 어느 봄날, 태자는 부왕과 한께 농경제의 파종 식에 찬가하였습니다. 그때 태자는 농부들의 마르고 고단한 모습과 쟁기를 끄는 소들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쟁기가 지나간 뒤 뒤집혀진 흙 사이로 기어 나온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 날아든 새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싯다르타 태자는 염부나무 밑에서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이를 지켜 본 정반왕은 태자를 세상과 더욱 멀어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하나, 태자의 세상에 대한 고뇌는 더욱 깊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문 밖을 나섰다가 동문, 서문, 남문에서 각각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들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후 태자는 생명을 가진 어떤 것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번민하다가 북문에서 만난 사람은 출가 수행자였습니다. 이 출가 수행자를 본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  수행만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4.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성을 넘어서 출가하시는 모습

수행자를 만난 후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태자는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에 백마를 타고 왕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애마 칸타카를 타고 마부를 따라 성을 나온 싯다르타 태자는 보검을 빼들어 스스로의 머리와 수염을 깍은 뒤, 자신의 비단 옷을 거지의 누더기 옷과 바꿔 입었습니다. 이 날은 태자의 나이 29세 되던 해 음력 2월 8일 이었습니다.


“나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많은 중생이 삶과 죽음의 고통 속에 있지 아니한가, 나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집을 나가는 것이니,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오분율》

수행자가 된 싯다르타 태자는 인도 남쪽의 신흥국가인 마가다국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에는 훌륭한 종교가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던 알라라 칼마라 문하에서 그가 가르치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배웠는데, 곧 스승의 경지를 도달한 싯다르타는 스승에게서 배운 성정을 통해서는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깨닫고, 독자적인 수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에서 고행하시는 모습

싯다르타는 다른 수행자처럼 고행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싯다르타의 고행은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것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찬탄한 <불소행찬(佛所行讚)>에는 그 고행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실로 고행자 중의 최고의 고행자였다. 남들이 바치는 음식도 받지 않았으며 풀과 떨어진 과일만 주어서 먹었다. 나는 무덤사이에서 시체와 해골과 함께 지냈다. 목동들은 내게로 와서 침을 뱉고 오줌을 누기도 했으며, 귀에 나무 꼬챙이를 쑤셔 넣기도 했다. 내 목에는 여러 해 동안 때가 끼어 저절로 살가죽을 이루었으며 머리는 길어 새가 찾아 들었다.


나는 하루를 대추 한 알로 보냈으며, 멥쌀 한 알을 먹고도 지냈으며 하루에 한 끼, 이윽고 이레에 한 끼를 먹고 보름에 한 끼를 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수척해졌다.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았고,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서까래 같았다. 뱃가죽은 등뼈에 들러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쳐 박고 넘어졌다. 살 갖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았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털이 뽑혀 나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싯달타 태자는 이미 목숨을 마쳤구나. 이제 목숨을 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누구도 행할 수 없는 고행을 하였으나 6년에 걸친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진정한 깨갈음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부처님은 고행을 포기하고 중도의 길을 찾았습니다.

당시 인도의 사람들은 고행을 함으로써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생활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고, 그런 고행을 한 사람은 신비하고도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고행의 포기는 출가 수행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나 관습까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른 수행자들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다섯 사람도 부처님이 타락하였다고 비난하며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 주저함 없이 고행을 포기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 전부가 외면하더라도 참된 것이라면 주저함 없이 결단을 내리는 참된 수행자의 모습이었습니다.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유혹을 이겨내시고 깨달음을 얻으시는 모습

수행자 싯다르타는 고행을 포기한 뒤 수자타가 올리는 우유죽 공양을 받아 기운을 회복하고 목동 스바스티카가 바친 부드럽고 향기로운 풀을 보리수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앉아서 굳은 다짐을 하였습니다. “내 여기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내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는 말을 <수행본기경>에 전해지고 있는데 부처님의 깨달음을 향한 굳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석 보다 굳센 의지로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이루셨고, 깨달으신 그 자리를 금강보좌(金剛寶座)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싯다르타가 선정(禪定)에 들어 깨달음을 얻으려고 할 때 중생을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마왕 파순은 다급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왕 파순은 사문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면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는 것과 그 깨달음이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깨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깨달음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의 세 딸을 보내 그를 유혹하였으나 싯다르타는 수미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의 몸은 비록 아름답지만 모든 악이 가득해 견고하지 않고 부정(不定)이 흘러 생로병사가 항상 따른다. 손에는 팔찌, 귀에는 귀걸이를 흔들면서 교태 석인 웃음으로 탐욕의 화살을 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대들의 욕망을 독약으로 안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하게 하고 사악한 욕정은 독사의 머리와 같으니 내 이미 모든 유혹을 뛰어 넘었다. 너희들은 모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물러가거라.”라고 말하자, 마왕의 세 딸들은 모두 추한 노파로 변해 탄식하며 물러갔습니다. 그러자 마왕은 화가 나서 싯다르타를 향해서 태풍, 폭우를 보내고 창칼, 불화살, 돌을 던지며 악귀를 동원하여 수행을 방해하였지만, 그것들은 부처님 앞에서는 꽃으로 변할 뿐이었습니다.


유혹과 폭력으로도 수행을 막지 못했던 마왕이 싯다르타 앞에 직접 나타나, 깨달음은 얻을 수 없고, 피로만 더 할 뿐이니, 세간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되어 오감이 쾌락이 주는 미묘한 맛을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자, 싯다르타는 마왕을 향해 “게으른 자의 무리여, 사악한 자여, 그대가 여기 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대가 말하는 그 좋은 공덕이란,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런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 주어라. 나는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어떤 욕망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보라, 내 존재의 이 순수를, 그대의 제1군대는 욕망이며, 제2군대는 혐오이며, 제3군대는 기갈이며, 제4군대는 집착이다. 그리고 그대의 제5군대는 피로와 수면이며, 제6군대는 공포심이요, 제7군대는 의혹이며, 제8군대는 위선과 고집, 그리고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익과 명성이며,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이 바로 그대의 전 병력이며 검은 마군이다. 그러므로 용감한 자가 아니면 너를 이겨낼 수 없으리.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그대의 공격을 이렇게 잘 막아내고 있다. 악마여, 사람들도 신들마저도, 그대의 군대를 격파할 수 없지만, 나는 지혜의 힘으로, 그대의 군대를 쳐부수리라. 굽지 않은 질그릇을 돌로 쳐 깨뜨리듯이.”----------《숫타니 파타》


또한, 부처님은 머나먼 과거 세월부터 한량없는 세월 동안 선근공덕을 쌓아 왔으므로 악마의 군대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마왕에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왕은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외쳤습니다. 부처님은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가리키며 “이 땅은 능히 일체의 물건을 내어 차별이 없이 평등한 행을 하도다. 원컨대 지금 진실을 말하라”라고 하자 땅을 지키고 있던 땅의 신이 “가장 큰 대장부이시여, 내 당신을 증명하리다. 제가 아나이다.”하고 외쳤고 이에 대지와 삼천대천세계의 국토는 크게 진동하였고, 마왕은 우렁찬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수행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마왕의 항복을 받았고 아무런 방해 없이 깊은 선정에 들었습니다. 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불상을 보면 왼손은 가부좌한 발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무릎에서 아래로 향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항복을 받으신 장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왕이 사라지고 깨달음을 가로막던 장애도 없어진 싯다르타 앞에 세상에 이치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 이치는 ‘모든 것이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명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라는 연기(緣起)의 진리였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바로 연기의 진리였던 것입니다.


깨달음을 방해하던 악마의 모습은 수행자 고타마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애착을 나타냅니다. 가장 먼저 끊을 수 없었던 것은 색욕(色慾: 육체의 욕망)으로, 마왕의 세 딸들 이름인 은애(恩愛), 상락(常樂), 대락(大樂)은 육체적 욕망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며, 마왕의 공격은 제8군대로 표현된 욕망, 혐오, 기갈, 집착 등 온갖 마음속의 번뇌를 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왕이 말한 전륜성왕의 자리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말하며 이것은 색욕이나 공포보다도 더 질기고 뿌리가 깊음을 나타낸 것으로 권력에 대한 욕망은 한 개인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 사회, 국가, 민족, 세계를 파멸로 몰아가는 제일 무서운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육체적, 제도적,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며, 마왕의 온갖 유혹과 위협에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퇴전의 수행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成道)라 함은 불도를 완성했다는 뜻으로 수행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 것을 뜻합니다. 이때가 부처님의 나이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 8일 이었고 사실상 불교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7.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시는 모습

부처님은 깨닫고 난 후 한동안 보리수나무 아래 머물며 삼매에 들어 있었습니다. 삼매에 든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으신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처님의 심정을 전하는<상응부경전>에는 ‘고생 끝에 겨우 얻은 이것을 또 남들에게 어떻게 설해야 하는가?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구나.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부처님은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마음을 버려라” 이런 결심을 한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리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를 생각하여 그들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그들은 세상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고, 다시 설산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를 기억해내고 그들을 찾아 녹야원으로 갔습니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에게 고행을 포기한 타락한 사문이라고 비난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그들을 향해 깨달음을 정하였습니다. 최초로 설하신 것은 중도(中道), 사성제(四聲諦),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설법과 대화, 토론을 통해 맨 처음으로 교진 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 수행자도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들이 최초의 비구인 것입니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이 있은 후 부처님께서는 야사를 비롯한 60명의 젊은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제자로 삼았습니다. 이런 사건들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들을 사람들은 부처님과 다섯 비구를 아라한(阿羅漢)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들은 함께 다니면서 많은 출가 수행자들과 在家信徒)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각 지방으로 가서 진리의 가르침을 전할 것을 권유하면서 “비구들이여, 자! 전도(傳道)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하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전도선언(傳道宣言)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으로 타인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나타나 있으며 그들을 떠나보내기 전에 하신 다음과 같은 당부는 깨달음의 실천적인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출가한 사람으로서 법을 펼 때, 남의 존경을 받겠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 된다. 남을 도울 줄 모르고 법을 위하여 먹고살려 하는 자는 ‘법을 먹는 아귀’와 같은 자다. 또 너희가 전하는 법을 듣고 사람들을 기뻐할 것이고 그럴 때 너희들은 교만해지기 쉽다. 사람들이 법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자기의 공덕으로 생각하면 그는 벌써 법을 먹고사는 아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먹고사는 아귀가 되지 않도록 항상 겸손해야 한다.


부처님은 우루벨라로 가서 당시 가장 이름 있는 종교가였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여 가섭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 1,000명을 부처님의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왕사성의 종교가를 모두 교화한 이 사건은 국왕과 백성을 모두 놀라게 하였고, 국왕인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특히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이 우기(雨期) 동안 머무르시며 가르침을 펴실 수 있는 사원을 기증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입니다. 부처님이 최초의 설법을 하시고 승단이 만들어졌던 당시에 부처님과 제자들은 아무 곳이나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면 나무 밑이나 동굴, 계곡 등 바깥에서 기거하였습니다. 이는 출가 수행자들이 안주할 수 있는 집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우기를 베나레스에서 지낸 후부터는 빔비사라 왕이 기증한 죽림정사에서 우기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자가하의 유복한 상인이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기거할 수 있는 승원을 기증하겠다고 부처님의 동의를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단 하루 동안 죽림공원에 집을 지었고, 그 다음날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승단에 기증하였습니다. 그 날, 상인의 누이동생의 남편인 수단타가 일 때문에 라자가하에 왔다가 상인의 집에 들렀지만, 부처님과 제자들을 모실 준비로 분주한 상인의 집에서는 아무도 수닷타를 맞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닷타가 이에 불만을 품고 있을 때, 상인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모실 준비를 끝내고 수닷타에게 다가와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수닷타가 그 다음날 아침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죽림정사를 찾아갔을 때 부처님은 밖에서 산책 중이셨는데 수닷타를 보고 그의 이름을 친히 부르시자 이에 감격한 수닷타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 발밑에 엎드려 가르침을 받고 재가신도(在家信徒)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 자신의 마을에서 다음 우기를 보내시라고 청한 수닷타는 자신의 마을인 사밧데이로 돌아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실 수 있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상적인 장소를 찾아내었으나 그 장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제다 왕자였습니다. 제다 왕자는 자신의 공원에 금화로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해 놓으면 공원을 수닷타에게 팔겠다고 하였습니다. 수닷타는 자신의 하인들을 시켜 공원을 금화로 깔았으나 문 가까이에 조그만 공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에 금화를 가져오게 하였고, 제다 왕자는 자신의 계약 조건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나머지 토지를 기증하였으며, 그 곳에 벚꽃 문을 만들게 하였고, 수닷타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건물과 그 이외의 시설물들을 세웠습니다. 이곳을 젯다바나 승원, 즉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하였고 그 후에 이곳이 부처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0대 제자의 한 분인 사리불과 목련건이 제자 250인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과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으며, 왕사성의 죽림정사는 사위성의 기원정사와 함께 전도의 양대 거점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지 몇 년 후에 고향인 카필라국에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여 역시 10대 제자의 하나인 아난과 라훌라, 아니롯다, 우바리 등의 제자를 출가시켰습니다.


◇ 초전법륜(初轉法輪)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것으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신 것을 말함.


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열반에 드시는 모습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부터 열반하실 때까지 45년 동안에 인도 지방을 유랑하면서, 수행자와 재가자, 귀족과 평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에게 평등하게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습니다.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깨달음에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하는 빈부귀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신 지 45년 부처님께서는 항상 중생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80세가 되신 해에 아난존자에게 “나는 이미 모든 법을 설했고 비밀을 없으며 이제 가죽 끈에 매어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낡은 수레와 같다. 너희들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의지 처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이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전법을 길을 떠나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 제자들에게 의심나는 것이 있는가를 세 번이나 물으신 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를 하시고 열반에 드시니 이 날이 음력 2월 15일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신 그 순간부터 열반에 드신 것이지만 미혹한 중생을 생각하시고 그 깨달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세상의 인연으로 생긴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스스로 따르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은 업(業)의 굴레에 매인 몸이 아니어서 영원히 태어난다거나 죽은 일은 없으므로 부처님은 ‘나의 육신은 설사 죽더라도 제자들이 법과 계율을 잘 지키고 행하면 나의 법신(法身)은 영원히 상주하여 멸하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부처님의 생애는 누구든지 부처님의 말씀대로 믿고 행(行)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이신 것으로 모든 중생이면 누구나 지닌 불성으로 깨달음의 최고경지인 열반에 들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네이버블러그 부처님의 생애|작성자 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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