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법인(三法印)
삼법인이란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의(敎義)로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법무아(諸法無我) •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하며, 이상의 세 가지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하여 사법인(私法人)이라고도 하고, 일체개고(一切皆苦)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 삼법인을 삼기도 합니다.
인(印)이란 인신(印信) • 표장(標章)의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이 잘못된 경해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과 사물의 실상(實相 :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 세 가지로 밝혀 주셨기 때문에, 마치 진리의 인장(印章)과 같이 하여 법인이라고 하며 말씀과 마군(馬軍)의 말을 관장하는 인(印)으로 삼습니다.
1) 제법무상(諸行無常)
‘변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뜻으로, 일체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 마음의 현상은 모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불변하는 것처럼 생각하므로, 이 그릇된 견해를 없애주기 위해 모든 것의 무상을 강조하여, 존재에 대한 시간적 판단으로 부질없이 온갖 것에 집착해 있는 중생들에게 존재의 덧없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는 집착을 떠나게 할 뿐만 아니라 존재가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해를 떠나게 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과 창조의 깨닫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2) 제법무아(諸法無我)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뜻으로,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아(我)에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므로, 시간적으로 일체의 존재가 무상한 것처럼, 공간적으로도 모든 것은 무아(無我)라는 것입니다. 이 무아(無我)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아(我)가 없다는 존재론적 입장을 밝힌 것이며, 일체의 존재는 모두 상관관계, 즉 인연으로 인(因)하여 생긴 것이어서, 특별히 자아(自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물이 수소와 산소의 결합(인연)으로써 물이 될 뿐, 본래 물이란 실체는 없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이 가르침은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든가 하는 자아에 관한 고정적 관념을 부정하여, 더 큰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3)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뜻으로, 시간적으로 덧없고 공간적으로 실체가 없는 일체의 존재,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인간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상주 불변의 인식과 나, 나의 것이라는 관념에서 항상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인간의 욕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고(苦)라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판단은 인생의 의의와 가치를 부정하는 염세관에서가 아니라, 현실을 바르게 인식함으로써 보다 향상된 생을 이루고자 하는 절실한 종교적 요구인 것입니다.
4) 열반적정(涅槃寂靜)
생사가 윤회(輪廻)하는 고통에서 벗어난 열반적정을 강조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의 원래의 상태인 고요함, 즉 적정(寂靜)이 인간이 추구할 최고 행복으로서의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미망은 자기의 주관을 절대시하거나 객관을 절대시하는 것에서 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固定觀念)에서 애착(愛着)이 생기며, 애착이 고(苦)를 낳습니다. 따라서 주관(主觀)도 객관(客觀)도 결국은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라는 사실을 통찰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그 위에서 집착 없는 실현이 이루어질 때 고(苦)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의 상태나, 소극적 지멸(止滅)의 상태가 아니라, 새롭게 순화된 종교적 자각과 실천행이며, 무상을 넘어선 절대생명의 활동으로, 거기서 나오는 가치전환의 즐거움, 그것이 곧 적정이며 열반인 것입니다.
◇ 열반(涅槃 : Nirvana)
① 어원은 니르바나(Nirvana)로,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하며,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말함. 그때 비로소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安樂)이 실현된다고 하며,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말함.
② 남방의 팔리 불교에서는 조림(稠林)이 없는 것으로, 번뇌의 숲이 없어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함.
③ 부파북교(剖派佛敎)에서는 석가불의 이상화, 신격화에 따라 열반에 대한 생각도 변하여,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 벌어진 열반은 체득하기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여,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 벌어진 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불완전한 열반)이며, 사후에 비로소 무여열반(無餘涅槃-완전한 상태의 열반)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여, 수행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는 달리 열반의 경지가 아니라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 봄.
④ 대승불교에서는 유여, 무여열반 외에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주장하여, 열반이 어떤 특별한 경지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범부(凡夫)의 미혹이며, 열반은 유(有)도 무(無)도 아닌 공(空)으로써 윤회나 열반이나 어떤 구분도 없다고 보고, 이 세상에서의 보살의 활동을 강조하였음.
◇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
일체중생의 심성(心性)이 본래 청정하여, 진여(眞如-있는 그대로의 진리)그 자체임을 달관하여 안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임.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
◇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대승불교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열반으로서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것으로, 비지원만(悲智圓滿-자비와 지혜가 원만함), 임운무작(任運無作-아무런 조작 없이 있는 그대로 운용됨)의 불 • 보살의 상태를 말함.
2. 사성제(四聖諦 : Catvari-arya-satyani)
출가 이전에 부처님의 관심사는 생∙노∙병∙사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생∙노∙병∙사에 대입시켜 중생을 위해 쉽게 가르쳐 주신 것이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제(諦 : Satya)는 진리의 의미로, 그 진리가 신성(神聖 : A굠)한 것이라 하여 사성제(四聖諦), 사진제(四眞諦)라고 하며, 콘다나 등 5인의 수행자들에게 행한 부처님의 최초의 가르침으로, 미혹의 세계와 깨갈음의 세계의, 인(因), 과(果)를 설명하는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로 고제(苦締 : Dubkha), 집제(集締 : Samudaya), 멸제(滅締 : Nirodha), 도제(道締 : Marga)를 말합니다.
1) 고제(苦締 : Dubkha)
현실세계의 참모습으로, 생존은 괴로움이라는 진리로, 인생의 고(苦)는 생노병사(生老病死)로 표시되며, 자연 현상으로서의 생노병사(生老病死)가 괴로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인생에 있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자기존재의 기반입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愛別籬苦:애별리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원증회고),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求不得苦:구불득고), 괴로움의 근본인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괴로움(五陰盛苦:오음성고-생존에 대한 집착)의 넷을 더하여 8고(八苦)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생 전체는 고(苦)를 면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苦)는 그 자체로서 괴로운 것이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고(苦)의 의미는 단순한 괴로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의 개념과 같은 것으로서, 존재에 대한 사색(思索)을 거친 고(苦)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가리켜 고제(苦諦)라고 합니다.
2) 집제(集諦 : Samudaya)
괴로움의 원인을 말하며, 생존의 고(苦)가 되는 것은, 모든 욕망의 근저가 되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인, 갈애(渴愛)가 있기 때문이며, 갈애에는 욕애(慾愛-감각적 욕망), 유애(有愛-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 무유애(無有愛-생존의 단절을 바라는 욕망)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행복을 구하는 것도 욕망의 일종이지만, 갈애는 욕망의 근본에 있는 불만족성으로, 고(苦)를 발생시키는 것은 지나친 욕망의 상태에서 오는 것으로 봅니다. 중생은 욕망이 항상 지나쳐, 갈애와 불길처럼 타오르는 번뇌의 상태에 속박되어 타율적이며 부자유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침을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집제는 갈애를 근본으로 하는 번뇌이며, 괴로움의 원인으로, 집제와 고제는 미망의 원인과 결과(結果)라 할 수 있습니다.
3) 멸제(滅諦 : Nirodha)
갈애(渴愛)가 남김없이 없어진 상태를 말하며, 애착 • 번뇌 • 탐착의 마음을 버림으로써 고(苦)를 여일 수 있다는 것으로, 이상적 경지로서 열반(涅槃) 이라고 말하며, 마음이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도 합니다. 갈애에 물들지 않고 행동하는 마음의 자유로운 상태이며 참된 즐거움입니다.
열반은 멸(滅)로도 번역되기 때문에 열반을 허무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멸(滅)은 갈애의 멸(滅)이지, 마음 그 자체의 멸(滅)은 아닙니다. 갈애가 멸(滅)함에 따라 올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그 자체에 의하여 알게 되는 부동의 진리가 열반(涅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의 법에 의하면 일체의 존재는, 상호의존의 상관관계에 있으며, 인간현실의 상황을 연기 법칙의 관전에서 본다면 욕망이 있으므로 고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욕망을 떠나면 고도 또한 없어지게 되므로, 연기 법칙에 따라, 멸성제는 고를 벗어나기 위해 욕망의 포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욕망을 다 버리고 살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도(中途)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문제는 치우치지 않는 적절함, 곧 중도의 길을 걸음으로써, 욕망은 적절하게 조절되고 고가 없는 생활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도제(道諦 : Marga)
고(苦)와 집(集)의 멸(滅)을 실현하는 길을 도제하고 합니다. 지나친 욕망을 없애는 길,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 도제이며, 열반에 이르기 위해 인간이 실천해 나가야 바른 수행방법이 8정도(八正道)입니다.
바른길(正道)이란 곧 중도(中道)를 말합니다. 중도의 중이란 가운데 길이 아니라, 적절한 길 바른 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정도(正道)라고 하며, 8정도(八正道)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으로, 점진적인 수행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유기적으로 수행하는 길을 말합니다.
3. 팔정도(八正道)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 진(瞋), 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 수행하여야 할 바른 길로, 아함경(阿含經)에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교설을 중생들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실천해 갈 수 있도록 구체화한 것으로, 특별한 것이기보다는 평범한 것이며, 팔정도를 네 부분으로 묶어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타의 가르침에 의해 인체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관찰하고 바른 견해를 갖는 일(正見).
• 바르게 생각고하,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일(正思, 正語, 正業).
• 바르고 정당한 직업으로써 살아가는 길(正命).
• 바른 종교적 수행을 실천하는 일(正精進, 正念, 正定).
1) 정견(正見)
일체 존재와 사물에 관해 바르게 관찰하고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삼법인에서 밝히고 있는, 제법의 실행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볼 것을 요구하는 견해의 정화(淨化), 관찰의 정화를 말합니다.
2) 정사(正思)
탐애와 번뇌에 얽매임이 없는 밝은 지혜로서 사성제의 이치를 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유의 생활을 말합니다.
3) 정어(正語)
정견 • 정사유에 의하여 항상 진리에 화합하는 바른 언어를 쓰라는 것입니다. 거짓말, 허황된 말, 악한 말 등을 하지 않고 의로운 말, 진리를 드러내는 말을 하는 언어생활의 정화를 말합니다.
4) 정업(정업)
정견 • 정사유에 의한 바른 행동을 말합니다. 몸과 입과 뜻의 세 가지 업(身口意, 三業)을 늘 정화하여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5) 정명(正命)
바른 생활, 즉 생활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정당하고 바른 직업으로써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직업의 귀천의 문제가 아니라, 직업의 정당하고 정당하지 못하고가 문제가 됩니다.
6) 정정진(正精進)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악을 방지하고 선을 실천하는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바르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활과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7) 정념(正念)
염을 전념 불망의 뜻으로써, 부질없는 욕망과 사념을 버리고 항상 바른 마음, 바른 기억으로서 거룩한 법을 실천 수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8) 정정(正定)
산란한 모든 것을 여휜 몸과 마음의 바른 안정을 말합니다. 곧 신심의 일체화로서, 몸과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일경성(一境性)의 상태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4. 연기설( 緣起說 : Pratityasamut pada)
모든 현상은 무수한 인(因:도셔)과 연(緣: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 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과(果:phala)도 없다는 설로,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 緣起:Pratityasamut pada)라고 합니다.
간단한 형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것으로, 중생이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고통을 받는 경우의 연기를 유전연기(流轉緣起), 수행하여 해탈로 향하는 연기를 환멸연기(幻滅緣起)라고 하며, 사제설(四諦說)도 일종의 연기설로서 고(苦) • 집(集)은 유전연기(流轉緣起), 멸(滅) • 도(道)는 환멸연기(幻滅緣起)를 나타냅니다.
<아함경(阿含經)>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한 말이나, 연기를 보는 자는 불(佛)을 본다고 설(設)한 것과 같이 연기는 법과 동일한 불교의 중심사상으로, 여러 이론이 제시되었습니다.
1) 업감연기(業感緣起)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업설(業說)이 부가되어 십이연기의 12지(支)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있다고 생각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시간적인 생기(生起)를 중심으로 연기설을 해석한 것입니다.
2) 진여연기(眞如緣起)
부파불교의 해설을 타파한 것이 대승불교운동인데, 최초에 등장한 반야경(般若經)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인도의 승려 용수(龍樹)에 의해 연기와 밀접히 관련지어져, 연기→무자성(無自性)→공(空)의 해석이 확립되었습니다. 즉 일체는 다른 것에 인연하여 현상계에 존재하며, 상호의존하고 있는 상인상대(相因相待)의 관계라는 것으로, 그 각각은 자성을 갖고 있는 존재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공(空)사상입니다.
3) 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
중기 대승불교에 일체의 현상은,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유식설(唯識說)이 있는데, 유가사지론(유伽師地論), 성유식론(成唯識論)등에서는 외계의 일체 현상은 말나식(末那識)의 활동과 이 말나식을 내포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내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4) 여래장연기(여래장연기)
모든 중생 속에서 깨달음의 가능성을 지닌, 여래의 인자가 있다고 하는 여래장(如來藏)사상으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둘러싼 외계의 번뇌(煩惱)에 의해 생사에 유전하는 연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래장 사상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등의 진여연기(眞如緣起)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5) 법계연기(法界緣起)
화엄경 법계연기는, 모든 연기를 이상세계로서의 법계의 전개라고 보고, 일체의 사물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이를 연기무애문(緣起無碍門)이라고도 합니다.
5. 12연기설(十二緣起說 : Dva dasa anga pratityasmut pada)
연기설의 일반적 형태는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원시불교, 근본교설 중 연기(緣起)를 가장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 12연기설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윤회(輪廻)의 이론부터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윤회(輪廻)런 일체 중생이 아득한 과거로부터 무궁한 미래에 이르도록, 끝없이 삼계(三界)와 육도(六途)에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마치 구르는 수레바퀴와도 같다는 뜻에서 이름 한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듯 끝없이 윤회함에는 반드시 그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주체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이라면 나고 죽음이 없을 것이고, 반대로 주체(主體)가 없는 것이라면 또한 여기서 죽고 저기서 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다 함께 윤회(輪回)는 설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불교에서는 윤회(輪回)의 주체를 어떻게 설명하는 것일까요? 모든 중생(衆生)은 어떤 실체가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오온(五蘊),즉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가 거짓 화합(和合)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정신과 물질을 결합(結合)시키는 힘이 곧 업(業)이라는 하나의 세력이요. 이업으로 말미암아 생멸(生滅)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마치 나무에 붙은 불이 바람의 힘에 의해서 다른 나무로 번져 가듯이, 육체에 붙은 정신(精神)의 불이 업력(業力)의 바람에 의해서 서로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면서 영원히 생멸(生滅)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육체와 정신은 없어지더라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의해서 일어난 불은 더욱 새로운 생을 일으키고 꺼지면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중생(衆生)의 생사(生死) 윤회(輪回)의 원리(原理)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이 업력(業力)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끊임없이 생사 윤회하는 양상(樣相)을 12단계로 나누어 관찰(觀察)한 것이 십이연기설입니다. 따라서 십이 연기설은 생사윤회의 근본(根本)이 되는 무명(無明)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사물(事物)과 존재(存在)에 대해문득 일으킨 잘못된 한 생각만 끊으면, 그것이 곧 도(道)를 벗어난 해탈(解脫)이며,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1) 무명(無明 : A- vidya)
명(明)이 아닌 것, 또는 명이 없는 것의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실체 아닌 것 또는 실재성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로 착각한 망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태를 나로 집착한 것, 또는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2) 행(行 : Samskara)
무명(無明)이 있으면 그것을 연(緣)하여 행(行:Samskara)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행(行)은 결합하는(sam) 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체화 하려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현대학자들 속에는 그 말을 형성작용이라고 번역하는 이가 있으며, 서구에서는 “impulse"라고 번역함이 보통입니다. 어떻든 인간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힘든 자기 형성의 업(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식(識 : Vienna)
행(行)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 곳에 식(識:Vienna)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식(識)은 불교에 쓰이는 중요한 술어 중의 하나인데 식별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개체가 형성되자 그 곳에 분별(分別)하는 인식(認識)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4) 명색(名色 : Kama rupa)
식(識)을 연하여 면색(名色:Kama rupa)이 일어나는데,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名)은 비물질적인 것은 가리킵니다. 오온설(五蘊說)로 설명하면 색온(色蘊)은 색(色)에, 수(受) • 상(想) • 행(行) • 식온(識薀)은 명(名)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명색(名色)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5) 육처(六處 : Sad ayatana)
명색(名色)이 있게 되면 그것을 연하여 육처(六處:Sad ayatana)가 일어납니다. 육처는 십이처설의 여섯 개의 감관, 즉 눈 • 귀 • 코 • 혀 • 몸 • 의지의 육근(六根)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개념입니다. 인간 실체의 근저를 이루는 것을 오취온(五取蘊)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명색(名色:五蘊)의 다음에 육입(六入)의 발생을 설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할 것입니다.
6) 촉(觸 : Samaparsa)
육처(六處)를 연하여 촉(觸:Samaparsa)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육근(六根) 육경(六境)과 육식(六識:눈 • 귀 • 코 • 혀 • 몸 • 의지에 발생한 식)이 화합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육처가 육경에 접촉하는 현상은 아닌 것입니다.
7) 수(受 : Vedana)
촉(觸)에 연하여 수(受:Vedana)가 발생합니다. 수는 감수 작용(感受作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경전에서는 그 내용으로서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중간 느낌의 세 가지 종류를 들고 있습니다. 접촉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보면 됩니다.
8) 애(愛 : Trsna)
수(受)를 연하여 애(愛:Trsna)가 발생합니다. 끝없는 갈애(渴愛:Thirst)를 뜻합니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수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합니다. 무명은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요, 애는 마음을 염착시키는 번뇌장(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9) 취(取 : Upadana)
애(愛)를 연하여 일어나는 취(取:Upadana)는 취득하여 병합하는 작용입니다. 애(愛)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10) 유(有 : Bhava)
취(取)를 연하여 유(有:Bhava)가 발생합니다. 유(Bhava)라는 말은 “bhu"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인데 있다(bo) • 된다(become)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입니다. 생사(生死)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경전에서 유(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의 삼계가 곧 그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삼계(三界)는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곳입니다.
11) 생(生 : Jati)
유(有)에 연하여 생(生:Jati)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생(生)한다는 뜻입니다. 유(有)가 생사(生死)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을 뜻한다면, 그것에 연하여 생이 있게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12) 노사(老死)
생(生)이 있으므로 노(老) • 사(死) • 우(憂) • 비(悲) • 뇌(惱) • 고(苦)가 있게 됩니다. 이곳의 생(生)과 사(死)는 육체적 생사(生死)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사(生死)한다고 보게 된 꿈과 같은 환상과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생사 다음에 우(憂) • 비(悲) • 뇌(惱) • 고(苦)가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6. 중도(中道 : Madhyama pratipad)
단 • 멸(斷 • 滅), 상 • 주(常 • 住), 유(有) • 무(無) • 고(苦) • 낙(樂)등의 대립과 집착을 떠나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즉 불교의 근본적 입장으로서 대승 • 소승을 통하여 중시되어온 사상이며, 부처님의 깨달음과 최초의 설법도 이 중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원시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고 낙의 이변(二邊)을 떠난 실천인 팔정도(八正道)와, 단 ∙ 상, 유 ∙ 무 등의 편견을 떠난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이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고(苦)를 피하고 낙(樂)을 구합니다. 안락(安樂)은 고와 대립하면서 인생의 이상으로 지고(至高)의 선(善)입니다. 여기서 고(苦)의 멸(滅)과 낙(樂)의 초월(超越)의 이중부정(二重否定)이 있습니다. 이중부정에 의하지 않고는 진실(眞實), 절대(絶對)가 현현(顯顯)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법상(法相), 유식(唯識)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천태종에서는 실상(實相)을,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법계(法界)를 중도로 해석합니다.
7. 육바라밀(六波羅蜜)
육도(六度)라고도 하며,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실천 수행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을 말합니다.
1) 보시(布施)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으로, 보시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분류가 있으나,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로 나누는 3종 보시가 대표적입니다. 보시할 때 중요한 점은 집착함이 없어야 하며, 청정한 것을 베풀어야 하며, 보시물에 기준을 두지 말고 베푸는 마음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2) 지계(지계)
시바라밀(尸波羅蜜)이라 하며, 몸과 말과 뜻, 3업에 대한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3) 인욕(忍辱)
어떠한 고통이나 원한, 모욕도 참고 견디며, 모든 번뇌를 떨쳐 버리고 불법을 꾸준히 닦아 가는 수행을 말하며, 다른 모든 계행을 북돋워 주는 바라밀입니다.
4) 정진(정진)
비라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이라 하며, 부지런히 수행하여 번뇌를 떨쳐 버리고 불법을 듣고 계율을 지켜 수행하는 것으로, 교만하지 않을 것, 안일함이 없을 것,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 선할 것 등을 말합니다.
5) 선정(禪定)
정려바라밀(精慮波羅蜜), 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 하며, 정신을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도록 깊은 명상에 드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6) 지혜(智慧)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지혜로써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이라는 피안에 도달하므로, 지혜(智慧)의 실천은 중생에 대한 무한하고 사심(死心)이 없는 자비심으로 바뀌며,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