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道詵國師)는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2년에 전남 영암군(靈岩郡)·구림촌(鳩林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라 왕족의 후손 김씨요, 어머니는 강씨(姜氏)였다.
강씨 부인이 도선국사를 잉태할 때에 꿈에 어면 사람이 구슬 한 개를 주는 것을 받아 삼켰더니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낳으니 이분이 바로 도선국사였다.
도선국사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모든 점이 범상한 어린이들 보다 뛰어났다.
15세 때에 구례군(求禮郡) 월유산(fT遊山) 화엄사(華縱寺)에서 예월화상(隸月褙尙)을 모시고 스님이 되었다.
이곳에서 5~6년간 대승경교(大乘經敎)를 연구하여 대의(代議)에 통하고, 20세 되던 해에 혜철국사(惠徹國師)에게 나아가 배우고, 동리산(桐裏山)의 서당 지장선사(西堂努葬禪師)를 찾아서 법을 묻고 도를 배웠다. 우리나라 풍수도참의 효시로 고려를 건립한 왕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신라(新羅) 49대 헌강왕(憲康王) 5년(879)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전국 500여군데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위하여 비보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남강변에서 청학(靑鶴)이 날아와 서기(瑞氣)가 충만함을 보고 이곳 청곡사를 창건하였다.
진감국사
혜소선사의 시호(諡號)는 진감(眞鑑)이며 속성(俗姓)은 최씨로서 비교적 늦은 31세의 나이로 출가하였다.
804년(애장왕 5)에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창주(滄州)에서 신감대사 (神鑑大師)의 제자가 되었고, 810년(헌덕왕 2) 당나라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혜소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선정과 지혜를 닦으며 참선하고 실천적 선수행을 통해 독자적 선사상을 형성하였다.
830년(흥덕왕 5년) 선사는 귀국하여 국왕의 환대를 받으며 상주(尙州) 장백사(長栢寺)에 주석하였고, 이후 지리산에 쌍계산문을 개창하고, 남종선의 소개와 확산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사는 우리나라 범패의 선구자라고 칭송된다.
선사는 화엄경의 유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화엄종의 포교방식과는 달리 범패를 통해 선사상을 확대하였다. 이후 범패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선사들이 많이 사용하였으며, 신라 말기 선종이 염불사상을 수용한 것도 범패가 가져온 결과였다.
850년에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헌강왕(憲康王)대에 이르러 진감이라 시호하사 하고 대공영탑이라 하여 비를 세웠다.
하동쌍계사에 고운 최치원이 쓴 진감국사 대공영탑이 세워져 있다.
상총대사
고려말,조선초 선승(禪僧).
고려말(高麗末) 우왕 때 실상사장로(實相寺長老)로서 청곡사를 중건(重建)했다.
1397년 태조 6년에는 왕명으로 향로를 만들어 신덕왕후의 명복을 기리고, 정릉(貞陵)에 흥천사(興天寺)를 개원, 조계종(曹溪宗)의 총본산으로 삼았으며 초대주지로 임명되었다.
일타 대종사
(율사(律師). 법호는 동곡(東谷) 또는 삼여자(三餘子).
1929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일타스님은 42년 통도사에서 고경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49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조계종 1∼3대 중앙종회 의원과 해인사주지, 은해사주지, 해인총림 율원장과 율주등을 역임했으며 93년에는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위촉되어 계율을 진작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53년 통도사 천화율원 (千華律院)에서 자운율사로부터 율장을 전수받았으며 이어 <범망경보살계><계율과 수행> 등 계율 관련 서적을 출간하고 해인총림 율주 등을 역임하면서 율사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또 46년 송광사 삼일암에서 수선안거를 시작한 이래 전국의 제방선원을 두루 거치며 화두일념으로 참선 정진과 중생교화에 매진해 온 선승으로 더욱 유명하다.
지난 54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천배씩 7일간 기도끝에 오른손 네손가락 12마디를 연비한 후 태백산 도솔암에 들어가 6년 동안 용맹정진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