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 조선, 1397년, 높이 39.0 cm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불교향로인 향완은 둥근 받침과 나팔형 간주, 원통형 몸체의 구연에 넓은 테두리인 전이 달린 기형의 향로이다. 향완은 통일신라시대의 불교향로를 바탕으로 계승, 발전시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향로로 고려시대인 11세기 후반경에는 기형이 완성되고, 11세기 말에는 은입사향완도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향완은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제작된 작품들이며 은입사향완은 14세기 지정연간(至正年間, 1341~1367)에 제작된 작품들이 많은 편이다. 향완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제작되며 조선시대의 청동은입사향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홍무30년(洪武30年, 1397) 청곡사명청동은입사향완(靑谷寺銘靑銅銀入絲香垸)이고, 가장 늦은 것은 강희13년(康熙13年, 1674) 통도사명청동은입사향완(通度寺銘靑銅銀入絲香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홍무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은 14세기 지정연간에 제작된 청동은입사향완과 기형과 문양 등에서 유사하다. 이 향완(香垸)은 둥근 받침과 나팔형 간주, 구연에 전이 달린 노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받침은 3단으로 구성하여 상단에는 연화당초문, 중단에는 뇌문을 은입사하였고, 하단은 문양 없이 외반되어 있다. 받침에 연결된 나팔형의 간주는 하단에는 연판문을 길게 은입사 하였고, 상단에는 여의두문을 은입사 하였다. 간주 위에는 2단의 원륭대를 만들어 하단에는 뇌문, 상단에는 연판문을 은입사하고 있다. 노신의 아랫부분에는 1단의 노신 받침이 있고, 여기에는 유운문(流雲文)이 은입사되어 있다. 노신의 하단에는 간엽이 있는 앙련의 연판문대를 은입사하고 있다. 연판문대 위에는 연화당초문과 범자(梵字)를 은입사로 표현하였다. 범자는 굵은 선과 가는 선으로 만든 동심원 안에 여의두문을 배치하고, 다시 그 안에 작은 원을 만들고 (aṃ hmaṃ dme ya tgi ma)의 6자의 범자를 은입사하고 있다. 청동은입사향완의 범자 주위로 여의두문을 장식하는 것은 정우6년(貞祐6年, 1218) 사복사명청동은입사향완(社福寺銘靑銅銀入絲香垸)부터 나타나며 이후 제작되는 고려시대의 청동은입사향완에는 공식처럼 표현되고, 조선시대의 청동은입사향완 중에는 홍무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이 유일하다. 청동은입사향완에 범자가 새겨지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나며, 고려시대에는 노신에 4자의 범자가 새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조선시대가 되면서 범자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범자의 주위에는 연화당초문이 상하로 배치되어 있고, 구연부 전의 측면에는 뇌문(雷文), 전의 윗면에는 당초문(唐草文)이 은입사로 표현되어 있다. 홍무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은 14세기 고려의 청동은입사향완과 기형이나 문양이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받침 상단을 크고 둥글게 처리한 점이나 이중의 동심원 안에 여의두문을 시문하고 다시 원을 만들어 범자를 시문한 점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 향완의 구연부 전의 뒷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大明洪武三十年丁丑 朝鮮國開國祖聖朝 中宮神德王后 本鄕晋陽大都護府裨補禪刹靑谷寺<br />寶光殿香 敬造靑谷重刱比丘尙聰 全爲百分常住僧堂所大藏印 成商轉法輪廣度衆生 同願駕<br />洛府院君金師幸贊成事金溱入絲金信剛靑銅夫金 명문에 따르면, 이 향완은 태조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향완의 명문에 기록된 청곡사 중창비구 상총(尙聰)은 보우(普愚)와 혼수(混修)의 문도로 송광사(松廣寺) 주지를 역임하였고, 1398년 신덕왕후 정릉의 능침사찰인 흥천사(興天寺)의 감주가 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흥천사를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고 전국의 모든 사찰을 송광사 제도를 본받아 수선사(修禪寺)의 선풍에 따라 선종(禪宗)은 전등록(傳燈錄)의 염송을, 교종은 경율의 논소를 강습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향완이 제작된 1397년에는 진양대도호부의 비보선찰이었던 청곡사의 중창비구로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명문에 나오는 김사행(金師幸)은 태조대의 환관으로 1397년 가락부원군(駕洛府院君)이 되었고, 김진(金溱)은 태조대 찬성을 지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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